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문단 편집) === [[안드로니코스 2세]](1282~1328) === [[안드로니코스 2세]]는 즉위 후 부친이 저지른 실책을 수습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282년 12월 25일 교회 일치 정책을 지지했던 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를 해임하고, 1285년 블라허나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방 교회의 [[필리오케]] 교리를 부정하는 내용의 신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르세니오스 분열을 종식하려 했지만,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총대주교들이 주교들의 대립을 수습하지 못하고 잇따라 사임하는 결과만 야기했다. 1310년이 되어서야 갈등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한편, 서방 전선은 세르비아의 맹공으로 위태로워졌다. 1283년,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스테판 드라구틴]] 형제는 흐리스토폴레 인근의 스트루마 일대의 세르지 일대를 관통하여 에게 해 연안으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고, 그들은 포로와 재물을 실컷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 중부로 후퇴하여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드라구틴은 영지로 돌아갔고, 밀루틴은 1284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데바로, 키체포, 포레시를 점령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북부를 공략하였으며, 뒤이어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를 공략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에 별 대항도 못하다가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고 딸 시모나다를 밀루틴의 왕비로 들이게 하고 나서야 겨우 공세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소아시아를 사실상 방치했던 부친과는 달리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우선 궁정을 소아시아로 옮기고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명장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를 기용해 투르크군을 무찌르게 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메안드로스 강 계곡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멘테세 토후국으로 진격하여 멜라노디온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1295년 가을,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들려 한쪽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다. 그가 사라지자, 소아시아의 동로마군은 지리멸렬해졌다. 그와중에 '''[[오스만 1세|오스만]]'''이라고 하는 한 튀르크 부족장이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의 쇠위트에 '''[[오스만 베이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제국령 비티니아를 향해 공세를 가했고 이들의 공세에 의해 급기야 소아시아의 대도시인 [[니코메디아]]까지 포위되자, 큰아들이자 공동 황제 [[미하일 9세]]가 이끄는 동로마 군을 투입했으나 [[바페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에 고용된 알란 용병대와 민병대가 서로 호흡이 맞지 않는 바람에 패배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 6,500명을 고용해 튀르크에 맞서게 했다. 이들은 여러 도시에서 튀르크군을 축출했지만, 튀르크인들보다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주민들을 짓밟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여러 번 충돌했다. 급기야 1305년, 그들은 제국을 배신하고 튀르크군과 합세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파괴한 후 [[아테네 공국]]과 테베를 정복하고 그곳에 눌러 앉았다. [[오스만 1세]]는 카탈루냐 용병대의 횡포로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아나톨리아 반도를 공격했고 얼마 안가 비티니아 일대 대부분이 오스만 1세와 그의 후계자인 오르한 1세에게 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1304년 대거 남하하여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플, 아흐토폴 등을 공략했다. 미하일 9세는 이에 맞서 스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맞붙었지만 패배하고 말았으며, 흑해 연안 마저 불가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가뜩이나 튀르크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불가리아 마저 강성해지면 제국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며 스레드나 고라 산맥 일대에서 독립된 세력을 꾸리고 있던 라도슬라프, 보이실을 후원해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 라도슬라프는 크란의 [[데스포티스]]이자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와 공모하여 토도르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도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1305년 알다미르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도슬라프의 군대를 격파해 라도슬라프 및 13명의 동로마 장성을 붙잡았다. 라도슬라프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고, 13명의 동로마 장성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도르의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교환되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현실을 인정하고 1306년 불가리아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전쟁으로 재정이 최악으로 치닫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친이 애써 구축했던 해군을 해산하여 [[제노바 공화국]]에 의존하였고, 군대를 대폭 감축하였다. 또한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신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재정을 복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민들은 무거운 세금에 반감을 품었고,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1321년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외세는 이 틈을 타 제국의 영역을 갉아먹었다. 1326년 4월 6일, 오스만 베이국군이 7년간의 포위 끝에 프루사를 함락하고 수도로 삼았다. 또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내전을 벌이는 양자를 지원하면서 이득을 마음껏 챙겼다. 이후 내전은 7년간 간혈적인 전투와 휴전이 반복되다가, 1328년 5월 23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면서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폐위된 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1332년 2월 13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